영화 '1987' 손에 땀을 쥐게 한 실제 상황들
1987년 1월 13일 자정, 박종철(호칭 생략)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되어 선배 박종운의 거취를 대라며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당합니다. 남영동으로 끌려가기 며칠 전, 당시 수배령이 떨어져 도망 다녔던 선배 '박종운'이 박종철의 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옆집에서 빌린 돈과 자신이 두르고 다녔던 목도리를 박종운에게 건네줬습니다. 박종철은 선배 박종운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일 외에는 진술을 하지 않았고 1987년 1월 14일 잔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습니다.
다음날, 1월 15일 중앙일보 석간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쇼크로 죽었다는 2단짜리 작은 기사가 실립니다.
당시 검찰 간부 방을 돌며 체크하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어느 방에서 '경찰, 큰일 났어' 하는 소리를 듣고 들어가 사건을 아는 체하며 탐문했고 '서울대생이라지?', '남영동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부분 부분 흘러나오는 말에서 남영동에서 한 서울대생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름도 '박'과 '종'을 겨우 듣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정보를 가까스로 알아내 학적부를 뒤져 그 학생 이름이 '박종철'임을 확인합니다.
"1월14일 오전 8시 10분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전 9시 16분경 조반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경부터 신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음"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 내용입니다.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둘러댔던 치안본부와 전두환 정권은 고문이 아닌 쇼크사로 몰며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합니다.
이전에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과 마찬가지로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은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 고문 사건 등 수 많은 고문 사건과 의문사가 발생했고 독재 정권의 탄압과 언론 통제로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에 눈을 뜬 시민들의 분노가 쌓여 끓기 시작합니다.
5월 18일 명동성당,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대표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전국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당시 영등포 구치소에 함께 수감되었던 고문 경관을 설득한 이부영과 김정남의 노력으로 비로소 진실은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국은 내무부 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경질하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으나, 사건 당시 고문 수사관이 5명이나 더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특히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치원감은 대공경찰의 대부로 서울 학림 사건, 전민노련 사건, 부산 부림 사건, 대전 한울회, 아람회 사건, 공주 금강회 사건, 전주 오송회 사건 등 수많은 용공조작 사건을 만들고 지휘했습니다.
6월 9일, 다음날 있을 '6.10 범국민대회'를 알리기 위해 시위에 나간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병원에 실려가 의식이 혼미한 순간에도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고 했고 1987년 7월 9일 사망합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소식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는 더 끓어 오릅니다.
그리고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
1. 대회 참가자는 태극기를 지참할 것
2. 6시를 기하여 애국가와 함께 경적을 울릴 것
3. 6시를 기하여 전국 교회, 성당, 사찰에서 타종할 것
4. 밤 9시부터 10분간 소등한 뒤 TV를 보지 말 것
정부는 대규모 집회를 막으려 버스, 택시의 경적을 떼어버리고 버스 정류장을 폐쇄하고 지하철은 무정차로 통과하게 했습니다. 국민대회를 주도했던 '국본'이 모이는 성공회 성당 주위를 사복 경찰과 전경들이 에워싸 시민의 접근도 막습니다.
이미 며칠 전 성공회 성당에 머물고 있던 국본 간부들은 예정대로 오후 6시에 성공회 성당에서 마흔두 번 종을 울리고는 밖으로 나오는 길에 전원 체포, 연행됩니다.
그러나 집행부 없이도 오후 6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수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렸고, 창 밖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시위대에게 박수를 쳐주며, 저녁 9시에 TV와 불을 끄는 등 '행동'합니다. 이는 집행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했지요.
박종철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지켜줬던 선배 '박종운'은
후배 박종철을 죽인 군사 독재 정권을 잇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부천 오정구에 출마했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민얼굴로 박종철의 영정을 들었던 고향 후배 '오현규'는 1년 뒤에 구속되어 옥살이를 했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2006년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해운대구 구의원에 출마, 당선됩니다.
참... 박종철 열사가 통탄할 일이라고 밖에는...
* 출처 : 아리솔 '26년전 6월' 중 http://arisolchan.tistory.com/271
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 서중석 (돌베개) /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동아일보, 6월항쟁기념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공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