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2019. 2. 6. 23:28


1987년 1월 13일 자정, 박종철(호칭 생략)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되어 선배 박종운의 거취를 대라며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당합니다. 남영동으로 끌려가기 며칠 전, 당시 수배령이 떨어져 도망 다녔던 선배 '박종운'이 박종철의 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옆집에서 빌린 돈과 자신이 두르고 다녔던 목도리를 박종운에게 건네줬습니다. 박종철은 선배 박종운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일 외에는 진술을 하지 않았고 1987년 1월 14일 잔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습니다.



다음날, 1월 15일 중앙일보 석간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쇼크로 죽었다는 2단짜리 작은 기사가 실립니다. 


당시 검찰 간부 방을 돌며 체크하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어느 방에서 '경찰, 큰일 났어' 하는 소리를 듣고 들어가 사건을 아는 체하며 탐문했고 '서울대생이라지?', '남영동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부분 부분 흘러나오는 말에서 남영동에서 한 서울대생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름도 '박'과 '종'을 겨우 듣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정보를 가까스로 알아내 학적부를 뒤져 그 학생 이름이 '박종철'임을 확인합니다. 



"1월14일 오전 8시 10분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전 9시 16분경 조반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경부터 신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음"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 내용입니다.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둘러댔던 치안본부와 전두환 정권은 고문이 아닌 쇼크사로 몰며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 합니다. 


이전에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과 마찬가지로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은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 고문 사건 등 수 많은 고문 사건과 의문사가 발생했고 독재 정권의 탄압과 언론 통제로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에 눈을 뜬 시민들의 분노가 쌓여 끓기 시작합니다. 



5월 18일 명동성당,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대표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전국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당시 영등포 구치소에 함께 수감되었던 고문 경관을 설득한 이부영과 김정남의 노력으로 비로소 진실은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국은 내무부 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경질하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으나, 사건 당시 고문 수사관이 5명이나 더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특히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치원감은 대공경찰의 대부로 서울 학림 사건, 전민노련 사건, 부산 부림 사건, 대전 한울회, 아람회 사건, 공주 금강회 사건, 전주 오송회 사건 등 수많은 용공조작 사건을 만들고 지휘했습니다.



6월 9일, 다음날 있을 '6.10 범국민대회'를 알리기 위해 시위에 나간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병원에 실려가 의식이 혼미한 순간에도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고 했고 1987년 7월 9일 사망합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소식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는 더 끓어 오릅니다.



그리고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


1. 대회 참가자는 태극기를 지참할 것

2. 6시를 기하여 애국가와 함께 경적을 울릴 것

3. 6시를 기하여 전국 교회, 성당, 사찰에서 타종할 것

4. 밤 9시부터 10분간 소등한 뒤 TV를 보지 말 것


정부는 대규모 집회를 막으려 버스, 택시의 경적을 떼어버리고 버스 정류장을 폐쇄하고 지하철은 무정차로 통과하게 했습니다. 국민대회를 주도했던 '국본'이 모이는 성공회 성당 주위를 사복 경찰과 전경들이 에워싸 시민의 접근도 막습니다.


이미 며칠 전 성공회 성당에 머물고 있던 국본 간부들은 예정대로 오후 6시에 성공회 성당에서 마흔두 번 종을 울리고는 밖으로 나오는 길에 전원 체포, 연행됩니다.


그러나 집행부 없이도 오후 6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수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렸고, 창 밖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시위대에게 박수를 쳐주며, 저녁 9시에 TV와 불을 끄는 등 '행동'합니다. 이는 집행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했지요.



박종철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지켜줬던 선배 '박종운'은 



후배 박종철을 죽인 군사 독재 정권을 잇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부천 오정구에 출마했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민얼굴로 박종철의 영정을 들었던 고향 후배 '오현규'는 1년 뒤에 구속되어 옥살이를 했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2006년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해운대구 구의원에 출마, 당선됩니다.


참... 박종철 열사가 통탄할 일이라고 밖에는...


출처 : 아리솔 '26년전 6월' 중 http://arisolchan.tistory.com/271

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 서중석 (돌베개) /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동아일보, 6월항쟁기념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공원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영화2019. 2. 6. 17:10


지금까지 이런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영화 극한직업 홍보효과로 한때 중단했던 '수원 왕갈비 통닭'을 다시 개시한 수원남문통닭집

튀긴치킨+갈비양념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page=1&divpage=1173&search_type=sub_memo&keyword=%BF%D5%B0%A5%BA%F1&no=628239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kfkdmldm&logNo=221458835029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인물2019. 2. 5. 17:21

"가장 거침없던 불굴의 활동가" 미국 뉴욕타임즈는 부고면에 김복동 할머니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유명 인사가 숨졌을 때 부고면에 그 행적을 담아내는데 할머니는 긴 부고에서 세계적 인권 운동가로 자리매김됐습니다. 로이터 등 주요 외신도 일제히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했습니다.



영국 BBC 방송 “침묵을 거부한 성노예 생존자”



미국 AP통신 “오랜 침묵을 깨고 첫 목소리를 낸 희생자”



뉴욕타임즈 "전시 성 노예 피해자들의 대표적인 인물"



일본 교도통신 “인권 운동가이자 일본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상징적 인물”



이외에도 NBC뉴스, UPI, 러시아의 노보스티, 중동의 알자지라, 인도의 더 힌두, 신남방권의 채널 뉴스 아시아등 각국의 매체에서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생애와 업적을 상세히 다뤘습니다.



외신이 집중 조명한 것은 전 세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렸던 할머니의 삶입니다. 딸만 여섯인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만 14세가 되던 1940년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딸을 내놓지 않으면 동네에서 살지 못하게 하겠다. 군복 만드는 공장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놀라 집을 떠난 이후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참담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일본 로이터 통신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고인이 원한 건 진정한 사과(Sincere Apology)"



 "전 성폭행 피해를 당한 지 3년쯤 지났는데 얼마나 더 지나면 잊을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지나면 울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될까요?’


그랬더니 연세가 93살인 김복동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고 눈물이 나올 거요. 죽어야 잊히겠지."


김복동 할머니는 8년간 위안부 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난 딱 하루였지만,"



"끝까지 싸워달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유언입니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김 할머니가 이마에 송골송골 진땀이 맺히면서 온 사력을 다해 한 말"이라고 전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께 누가 가장 보고 싶으냐고 여쭈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


"나는 죽거들랑 불에 태워서 훨훨 뿌려주라고 했어. 누가 돌볼 거라고 묘를 만드나. 그래서 저 산에 훨훨… 산에다 뿌려주면 훨훨 나비가 되어서 온 천지 세계로 날아다니고 싶어"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764690&pDate=20190131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65666.html#csidx73c7a723a9bf67b919df5a6e74c597c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인물2019. 2. 5. 17:07


"김복동 할머니께서 어제 영면하셨습니다. 흰 저고리를 입고 뭉게구름 가득한 열네 살 고향 언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1993년 할머니의 유엔 인권위 위안부 피해 공개 증언으로 감춰진 역사가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피해자로 머물지 않았고 일제 만행에 대한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앞장섰습니다. 조선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다른 나라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연대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 일에 여생을 다하셨습니다.


지난해 병실에서 뵈었을 때, 여전히 의지가 꺾이지 않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 스물 세분을 위해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할머니, 편히 쉬십시오."


-문재인 대통령-



"끝까지 싸워달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유언입니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김 할머니가 이마에 송골송골 진땀이 맺히면서 온 사력을 다해 한 말"이라고 전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https://www.facebook.com/TheBlueHouseKR/posts/2279401735681387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인물2019. 2. 4. 18:13


"난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제가 겪은 일들을 꼭 이야기해야 하는데 너무 부끄럽습니다.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저는 유모로 일하는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공장에 다니다가 16세가 되던 1944년 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습니다. 

 

위안소에서 도망가려다 온갖 폭행을 당했고 잡곡과 쌀죽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본군들은 개 돼지 보다도 더 추악했고 한국말을 하면 폭행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세계 성폭력 만행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반드시 사죄해야 합니다"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생존자 이제 37명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7살의 나이로 중국 훈춘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몇 번의 탈출 시도로 구타를 당해 왼쪽 고막이 터져 할머니는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3년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7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중략)

 

할머니는 지난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며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증언했다.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나눔의 집에 1천만원, 한 천주교 단체에 1억 5천만원 등을 기부한 바 있다.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뉴스2019. 1. 21. 20:59

후반 터진 동점 골, 그리고 연장전 후 승부차기 끝에 극적인 승리. 베트남 언론은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의 경기였다"고 흥분했습니다. 2007년 이후에 두 번째로 아시안컵 8강에 진출하면서 "이변이다, 마법이다" 이런 말들이 다시 쏟아지고 있죠. 


피파 랭킹 100위, 베트남은 이미 한 달 전 동남아 축구대회에서 10년 만에 우승했고, 당시에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계속 놀라운 결과를 이어가다 보니까 이젠 그 성취가 정말 기적일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평균신장 175cm로, 아시안컵 출전국 가운데 가장 작은 대표팀. 턱걸이로 올라온 16강. 이렇게 과정은 극적이었지만 8강 요르단전에서 베트남은 점유율은 물론이고 패스와 슛까지 모두 앞섰습니다.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축구의 드라마와 같은 120분은 베트남도 다시 달아오르게 만들었습니다. JTBC 취재진이 베트남 하노이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조그만 TV 1대를 앞에 둔 사람들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모으고, 또 탄식하다 골이 들어가자 주먹을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승리를 받아든 베트남, 경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거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거리에는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를 달고 부부젤라를 불며 승리를 만끽하는 오토바이 행렬이 밤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1년 전 23세 선수들이 일군 아시아대회 준우승, 지난해 9월에는 아시안게임 4강. 또 지난달에는 동남아시아 대회 우승. 그리고 아시안컵 8강까지.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759745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이슈2019. 1. 19. 13:01

강서구에 있는 특수학교는 수용인원 85명인 '교남학교' 단 한곳


원래 교육청 소유 학교 부지라 학교 이외에는 다른 건물은 세울수 없는데 법적으로 불가능한 한방병원 건립을 공략으로 내걸어 주민간의 갈등만 깊어지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장애 학부모 무릎 꿇은 강서구 특수학교 공청회, 특수학교 역사에 한 획"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
정보2019. 1. 19. 11:44

낡고 오래된 소재로 여겨지던 서커스를 살려내 세계적인 대형 공연으로 만든 게 바로 이 태양의 서커스입니다. 태양의 서커스 내한을 보며 한국 최초의 서커스단으로 시작해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동춘 서커스의 소식도 궁금해졌는데요. 태양의 서커스와 함께 돌아보는 우리나라 동춘 서커스의 추억까지 함께 돌아보시죠.



한국 최초의 서커스단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커스단입니다.



전국을 돌며 아찔한 묘기를 선보이는 서커스는 가난했던 시절 거의 유일한 볼거리였습니다. 60∼70년대에는 단원이 300명 정도에 이르고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동춘서커스단에서 활약하던 남철 남성남, 서영춘 씨와 같은 스타들도 방송으로, 영화로 떠났습니다. 서커스는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경영이 어려워진 서커스단들을 덮친 건 동물학대 논란. 여기에 어린이 감금 사건까지 터지면서 서커스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94년 역사의 동춘서커스 단원은 현재 40여 명. 대부분 중국인입니다. 아직도 지방축제를 찾으면 호응이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국내 유일의 서커스단이라는 자부심 속에, 대부도에 상설 공연장도 냈습니다. 만 오천 원에 느끼는 향수와 나들이 코스로 자리 잡으면서 지난해 이곳을 찾은 관객이 12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태양의 서커스도 시작은 캐나다의 거리의 예술가 20명으로 1984년 출발했습니다. 동물 없는 서커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쇼를 내세워 지금은 직원 4천 명을 거느린 대형 공연기업이 됐습니다.



묘기를 이야기로 엮어내는 방식,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 여기에 자본이 결합해 화려한 경험을 선사하는 세계적인 공연이 된 겁니다.



태양의 서커스와 직접 비교는 힘들지만, 대중문화의 모태로,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헤아리는 한국 서커스.



우리 문화산업 한켠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합니다.


출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076115&ref=A

Posted by 꼭 출처를 밝혀주세요